“고대 중국 사람들은 일찍이 불가의 미를 숭상하였다. 괴석怪石 같은데 약간의 가공을 했을 때는 손댄 자국을 없애기 위해서 물속에 몇 해를 넣어두었다가 감상을 하였다. 이것은 자연석의 경우에 인공이 가해진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이겠지만 옛날 사람들이 불가의 미를 최고로 삼은 것은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던 탓이다.
현대 조형 이념이 형체의 모델링보다도 작가의 정신적 태도를 더욱 중시하고 있는 것은 동양 사상의 불가의 미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틴 브랑쿠시나 헨리 무어의 작품이 조각으로 보이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은 조형에 대한 순수한 의미를 구하는 태도고 보니 이것은 역시 불가의 미다. 즉 자연에서의 조화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그러면서도 작품은 확실하게 외연巍然히 존재하면 서 항상 자연의 대 질서와 상통하는 격조를 지니게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조각은 대자연의 질서를 집약과 확산의 동시 작용이 있다. 우리가 항상 희구하면서도 얻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정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무한한 것, 영원한 것, 행복한 것 등인데 인 간은 여기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온갖 노력과 방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란 것을 따지 고 보면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인간의 고뇌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득 이 세 가지를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히 사소한 우리의 신 변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한 포기의 화초나 나뭇가지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을 발견하지 않는가. 그리고 인간의 절실한 요구인 행복이란 것도 백억의 재 산이나 절대한 재력에 있다기보다 극히 사소한 일시의 기분이나 생리적인 어떤 조화에서 실제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김종영(1915-1982) 선생은 집안 내력으로 인해 ‘선비 조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부친에게 가학家學으로 선비로서 갖춰야 할 소양교육을 익혔다. 이는 선생의 글과 유족의 증언, 그리고 신 문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선생이 남긴 서예작품 중에 한문으로 쓴 자작自作이 여러 점 있는 것으로 봐서 선생이 한학漢學에 조예가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이다. 창원 생가 길 건너에‘서 미루四美樓’가있다. 사실 생가와 사 미루는 한 울타리에 있 던 집이다. 구획정리사업으로 집 한가운데 도로가 생기며 나뉜 것이다. 사 미루는 별채의 대 문채를 일컬으며, 별채는 ‘구민정求文亭’이라 하였다. 선생의 증조부인 모연慕淵 김영규가 1926년 구문적을 지은 이유는 ‘구 문’이 뜻하는 바와 같이 조선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가 어우러진 시회詩會를 개최하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서이다. 사미르 편액은 석촌石村 윤용구와 의친왕 이강의 글 중 석촌 것을 판각하였다. 구문 중에서 첫 번째 시회는 1928년에 개최되었으니, 선생 나이 열셋일 때이다. 선생의 증조부는 구문 정의 주인으로 시를 지어 운운原韻으로 하여 각지의 문사들에게 차운次韻한 시를 받아 판각하여 구문적에 걸어놓았다. 구민정 기문 記文은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정만조가 지었다. 또한 정대유가 선생 조부에게 선사한 열두 폭 서예작품을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구문적을 출입하던 문사들의 수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은 열 다섯에 서울 휘문고보로 유학가기 전까지 조선 사대부문화의 정수를 체화하였다. 이는 선생이 훗날 동시대 서양미술을 수용함에 있어 서화書에 대해 자기비하自己卑下 함을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이유이다.
선생은 선비 조각가’로 알려진 것과 같이 조선의 선비가 그랬듯이 수양의 방편으로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고, 문집을 간행하여야 하는 책무에 충실하고자 동년배 작가 중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선생의 글쓰기는 서예와 문집 두 가지를 아우른다.
먼저 선생의 서예작품은 대부분이 한문이며 한글작품은 소수에 불과하다. 서예작품의 출전을 살피면 대부분 유가儒家와 노장老莊이다. 서예작품을 출전과 비교했을 때 몇몇 작품에서 오탈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 선생 은 원문을 보고 쓰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선생의 동양고전 독서 수준을 짐작게 하는 실례이다.
유족에 의하면 생전에 선생은 머리맡에 도톰한 노트를 놔두고 수시로 글을 썼다고 한다. 지금 미술관 은 선생 유품으로 여덟 권의 노트를 소장하고 있다. 그중 일부가 유고집『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 수록되었다. 더불어 선생이 삼십이 년 간 봉직한 서울대학교의 학보 『대학신문』에도 여러 편의 글을 게재하였다. 『대학신문』에 게재한 글과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면, 유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교육자로 선생이 생전에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지적인 탐구를 폭넓게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은 한문 세대이다. 유고를 읽다 보면 요즘 흔히 쓰지 않는 한문 단어가 여럿 눈에 띈다. 그런 연유로 선 생의 유고는 한글세대가 읽기에는 어렵다. 선생의 글은 화려한 수사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뜻글자인 한문 의 특성과 같이 함축적이면서 간결하다.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 선생이 작품 제작 시 지향했던 바이지만, 글쓰기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분량으로 봐서는 단상斷想이라 할 수 있으나 행간을 살펴 읽 이어보면 그 내용이 참으로 풍부하다.
김종영 선생은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 「선비조각가」, 「각백刻伯」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선생이 동경미 술학교에서 조소를 전공하였고, 1948년부터 1980년까지 삼십이 년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봉 직하며, 조각의 불모지에서 조각예술교육에 일생을 헌신한 것을 상기한다면, 조각가로서 위와 같은 선생 의 별칭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 선생이 남긴 작품들을 일괄해보면 선생을 조각가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 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현재 유실된 작품을 포함하여 확인 가능한 조각 작품이 228점이다. 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선생 의 유화, 수묵화, 담채화를 포함한 드로잉 작품은 약 3,000점이다. 유족의 기억에 의하면 선생이 생전에 보관상태가 불량하여 폐기처분한 드로잉작품이 이에 버금간다고 한다. 또한 약 2,000점의 서예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을 조각가로 규정하는 것은 현재 미술대학의 학과중심 교육제도에 서비롯된것이아닐까싶다.
선생은 첫 개인전을 환갑에 후학들이 회갑기념으로 개최해드렸던 것을 상기하면, 생전에 작가로서 선생의 전모를 살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도록 서문을 쓴 고故 이경성 전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선생을 “과작寡作의 작가”라 했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정년퇴임하던 1980년 5월, 당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초대전으로 개최되었다. 이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래 최초로 개최한 조각가 초대전이었다. 「불각의 미」는 선생 사후 일 주기를 맞은 1983년에 간행된 유고집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 게재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불각의 미」는 2015년 선생 탄생 백 주년 전시 제목으로 선정될 만큼 선생의 예술 관을 대표하는 글이 되었다.
글 모두에 인용한 ‘불각의 미’는 오백 자 원고지 네 매 조금 넘는 짧은 글이다. ‘불각의 미’는 필연적으로 깎아야 하는 조각가가 깎지 않는 아름다움을 논하는 역설이기에 마치 선승禪僧의 화두 같이 들린다. 선생 사후연구자들은‘불각의미’를어떻게읽고있을까?
1989년 7월 당시 호암갤러리에서 서예작품을 제외하고 사후 첫 번째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당시 정병 관 교수는 「불각의 미를 추구한 추상조각의 선구자」라는 제하로 도록에 게재한 서문에서 ‘불각의 미’를 서 구 다다 dada의 ‘레디 메이드 ready-made 미학’과 연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레디 메이드 미학을 김종영은 ‘불각의 미’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되도록 조각가의 작업량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 즉 작업의 경제성이라는 견지에서 자연물이 가지는 형태를 최대한 이용한다는 원리는 현대 조각의 레디 메이드 미학서 또는 미니멀 예술에서 그 극단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법이나 문법에서 시작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 시작하여 작품으로 결과하는 비이론적非理論的 경향이 동양의 전통이라고 본다면, 김종영의 조각은 시대사조를 나름대로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동양적인 작가다운 번안을 작성한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이글에따르면‘불각의미’는서구레디메이드혹은미니멀미학의‘한국적번안’인것이다.그이유는‘불 각’이 ‘깍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깍지 않는 것에 방점을 둔 것은 아마도 선생이 자서自書에 “나는 복잡하 고정교한기법을싫어하는데그이유는숙달된특유의기법이나의예술활동에꼭필요하다고생각지않 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표현과 기법은 단순하기를 바란다.”는 대목에 집중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점은 ‘번안’이라는 표현이다. 한때 번안 가요가 유행했던 것을 기억한다. 번안가요가 유행했던 이유 는 당시 외국곡의 멜로디가 한국 가요에 비해 세련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번안 가요의 특징은 멜로 디는 원곡 그대로이나 가사는 원곡과 무관하게 우리말로 개사한 노래다. ‘번안’은 원작의 의미와는 무관하 기에 원작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야 하는 ‘번역’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문맥상으로 봐서 ‘번안’이라는 단 어보다는 ‘자기화自己化’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2002년 이십 주기를 맞아 김종영미술관이 개관하였다. 2005년 탄생 구십 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 관 덕수궁관에서 『한국현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전이 열렸고, 부대행사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당시 학술대회에서 김현숙이 발표한 논문 「김종영 예술의 법고창신法古創新적 경계-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중심 으로」는 처음으로 김종영 조각을 추사 선생의 서예작품과 비교 분석하였다. 이 논문은 선생의 글 「완당과 세잔느」에서 비롯되었다. 더불어 마순자가 「김종영의 미술개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처음으로 선생 의 드로잉을 연구 분석하였다. 김정희는 「김종영의 서구조각 수용-분석과 직관의 결합」이라는 제하의 논문 을 통해 선생의 추상조각 작업을 분석하였다. 글의 마무리를 다음과 같이 했다.
“... 김종영이 브랑쿠지와 무어를 동일시한 것은 자연 원리를 분석적으로 접근한 조형방식과 그것에 직관 적으로 접근한 방식을 작가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이러한 미술사의 ‘오해’를 통해서 그에게서는 위의 양대 흐름이 결합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분석과 직관이라는 대립적인 세계 인식 방식을 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 이러한 직관과 분석이 결합되어 나온 그의 조각은 브랑쿠지 작품보다는 서정적이고, 아르프의 그것보다는 금욕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그의 조각 고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이 “브랑쿠지와 헨리 무어를 동일시한 것”이라 함은 김정희가 「불각의 미」를 염두에 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에 따르면 선생은 두 작가의 지향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발생한 오해로 분석과 직관을 결 합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선생 작품의 특징은 서정적이며 금욕적이라는 것이다.
‘관점이 대상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관찰자의 입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무엇을 볼 것인 가는 자의적 선택이다. 「불각의 미」의 행간을 살피면 선생은 직관과 분석이라는 두 작가의 방법론을 논하 고자 하지 않았다. 선생입장에서 ‘불각의 미’와 상통하는 서양미술의 예를 살펴본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사 에 오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이상에서와 같이 선생의 유고 「불각의 미」가 1983년 세상에 알려진 이래, 미술사학자들은 「불각의 미」 글 내용에 대한 성찰보다는 동시대 서구미술흐름에 맞춰 단어 ‘불각’을 설명하고자 했거나, 아예 그 뜻을 살피기를마다했다.사실이러한시도는낯설지않다.그이유는두가지이다.첫째,선생의작품론을쓴연 구자들은 모두 서양미술사를 전공하였다. 서화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둘째, 지난 세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체화된 “새것 콤플렉스” 가 지금도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1950년대 말 대두된 ‘앵포르멜’작가들의 ‘내적 필연성’의 논쟁을 시작으로 외국작가 작품의 ‘표절시비’이다.
1983년 「불각의 미」와 함께 선생의 서예에 대한 식견을 짐작할 수 있는 유고 「유희삼매」와 「완당과 세잔 느」가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선생이 타계 한 후에도 선생의 예술세계 의한축을이루는서예는세상에공개되지않았다.
선생의 서예작품은 2009년 『김종영 서법묵예書法墨藝』 (이하 서법묵예)발간을 기념하여 김종영미 술관에서 개최한 『刻道人書-조각가 김종영의 서화』전을 통해 서예작품 오십 점과 먹그림 열여덟 점이 처 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실 선생이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서예작품을 전 시한적이없어서가족과주위몇분을제외하고는그런사실을전혀알지못했다.그런연유로이전시는 ‘한국추상조각의 선구자’인 선생을 이십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새롭게 조망해 자리매김 해야 함을 깨닫게 되 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를 통해 선생의 진면모를 일찌감치 인지한 분이 최종태 김종영미술관 명예관장(이하 명예관장) 이다. 1999년 최종태 명예관장은 스승에 대한 추억을 엮어 『회상·나의 스승 김종영』을 출간하였다. 책 중 에 우성과 완당」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십년 후 『서법묵예』를 발간을 기념하여 『한 예술가의 회상』이라 는 제목으로 재출간하며, 그 내용을 보완하여 같은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글에 소개된 추사선생 작품 감정 과 연관된 일화와 선생이 추사고택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통해 선생의 서예수준과 시공을 초월하여 선 생이 추사선생을 사숙私塾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그와 같은 스승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최종태 명예관장 은 『서법묵예』 서문에 다음과 같이 선생의 서예에 대해 기술하였다.
“우성 선생의 붓글씨는 본령인 조각보다도 더 김종영 다운 일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가 뜻하고 있었던 바자유를만끽하고참으로즐겁게일한흔적으로보였다.어린시절부터워낙몸에익어서그런지매임 이 없고 막힘이 없는, 그야말로 유희삼매遊載三昧란 뜻에 어울릴 만치 아기들이 노는 풍경에 닮아 있었 다. 선생이 후년에 이르러 형태가 무르익을 때, 붓의 운용運用이 조각에 녹아 있는 것을 잘 볼 수 있다.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란 말이 요새는 옛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그런 고전적인 예술론을 실천 한 것은 희귀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림은 그림만으로, 글씨는 글씨만으로, 조각은 조각만으로, 학 문은 학문대로 서로의 연결이 끊긴 현대적 상황에서, 선생은 예술에 인문학적 바탕을 도입하여 현대예 술의격을높였다....
...그는세상에서한참저만큼떠나있었다.글씨내용으로본다면무궁세월에서놀던큰도인道人같 다. 각인刻人, 각도인刻道人 하다가 나중에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 하고 ‘불각不刻의 미美’라는 글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 만드는 시대를 습작의 시기로 본다면 불각의 시대는 예술의 시대이다.”
최종태 명예관장의 스승의 서예에 대한 견해는 그동안 미술사학자들이 선생을 연구하며 간과한 부분이 무 엇인지살필수있는단초를제공하였다.그것은다름이아니라더이상조각가김종영이아니라미술인김 종영으로, 선생의 연구를 위해서는 조각, 드로잉, 서예, 유고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에 선생 탄생 백주년을 맞아 김종영미술관, 서울대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공동으로 대규모 회고전 을 개최하였다. 백주년 기념전 전시 제목은 『불각의 아름다움-조각가 김종영과 그의 시대』이었다. ‘불각의 미’ 를 전면에 내세운 것으로 봐서 ‘불각의 미’는 이제 선생의 고유한 미학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전시도록을살펴보면조각작품여든일곱점,드로잉스물세점,그리고서예여덟점이었다.백주년기 념 전시는 ‘조각가 김종영과 그의 시대’라는 부제와 더불어 조각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을 통해 백주 년 기념전 『불각의 아름다움』은 ‘조각가 김종영’에 집중한 전시였다. 당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 세편의 논 문이 발표되었다. 그 중 김진아의 「‘초월’을 향하여: 김종영의 초기 추상 작품과 서구 미술 (1952-1960)」
과 최태만의 「김종영과 한국 현대조각-해방 후로부터 1967년까지 국전을 중심으로」 두 편이 선생의 조각 작품 연구 논문이었다.
김진아는 1952년부터 1960까지 선생의 초기 추상 조각 작품들을 분석하였다. 그녀는 선생의 1950 년대작품이특정한양식을갖지않는다는점에주목하였다.그녀는당시선생작품의그와같은특징 이 양식의 부재 혹은 무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양식의 틀을 깨는 ‘무위無爲의 양식’이라 간주하였다. 무위 는 노장老莊에서 말하는 무위가 아니라 장 뤽 낭시 Jean-Luc Nancy의 ‘무위의 공동체 The Inoperative Community’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이어 무위의 양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는 (무위의 양식은) 하나의 양식을 규정짓는 동질적 정체성을 갖지 않고 다른 양식들이나 ‘차이’에 열 려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새롭게 나아가는 ‘양식 아닌 양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위의 양식은 비대칭적이고 이질적인 관계나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서구의 다양한 양식과 조우하며 만나되 양 식 또는 사조 특정적인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신의 작업관이나 미감과 어우러지는 열려있는 양 식을 의미할 것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맺었다.
“김종영의 작업은 그 핵심적인 형과 구조, 리듬, 생명감을 물질을 이용해 구체화하는 여정이었으며, 그 렇게 탄생된 작품은 자연적 형태의 모방이나 반영 또는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대등한 전체로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예술의 본질은 유희이자 진리를 찾아나가는 구도의 길」이었으며, 그 과정은 자신의 주변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묵묵히 성실하게 작업에 매진하면서도 양식, 지역, 시대 모두를 뛰어넘는 초 월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녀의 결론은 선생이 1957년 11월에 쓴 당신의 바람을 연상시킨다. “굳이나라는것을고집하고싶지는않다.또한시대에한계를두고싶지도않다.지구상의어느곳에고
통할 수 있는 보편성과 어느 시대이고 생명을 잃지 않는 영원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
이 글은 정황상 선생이 한창 서구추상미술을 연구할 때 쓴 단상이다. 선생은 1953년 5월 3일자 『대학신 문』에 게재된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 입상기념 인터뷰에서 자신의 포부16)를 밝힌 이 래 서구추상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 그리고, 제작해보았다. 동시에 서구추상미술이 어떤 역사적 맥락 에서 전개되었는지 공책에 정리하며 다양한 작가들을 연구했다. 한마디로 ‘실험기’였다. 실험기가 십년을 지속했다. 실험 방법은 어려서부터 체화 된 서예 학습법, 즉 임서臨書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였다. 이유는 글 모두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연구자들이 서예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2016년3월1일서울예술의전당내서예박물관이이년여에걸친리모델링후재개관하며기획한『20 세기 서화미술 거장전』 첫 번째 전시로 2017년 12월 『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를 김종영미술관과 공동기 획으로 개최하였다. 이 전시는 제목이 풍기는 인상과 같이 선생의 조각예술이 서예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 고 있는지 살펴보는 첫 번째 대규모 전시였다. 지난 이십세기 한국미술이 ‘서화에서 미술로의 전환기’임을 감안할 때 선생이 작가로서, 교육자로서 서화와 미술의 가교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였음을 실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전시에는 선생이 익힌 가학家學 수준을 짐작케 하는 추사선생의 서첩을 비롯해서 선대부터 소장했던 서예와 시문詩文 작품들과 선생의 휘문고보 시절부터 타계할 때까지 일생동안의 서예, 회화, 조각 그리고 유고를 총 망라해 편년으로 선보였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전시기획취지에서 선생을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여기서 왜 지금 다시 김종영에게 있어 역사와 전통에 방점을 두고 세 번, 네 번 이렇게 반복해서 되새김 질할까. 결론을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본 대로 우리는 물론 서구 입장에서도 김종영은 세계 조각의 역사 한 페이지를 새로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앞서 본 대로 대 자유大自由로 직통하는 유희와 적멸寂滅 무설無說의 ‘불가의 미’와 같은 사의寫意라는 동아시아의 필묵 언어로 추상이라는 서구 조각 언어에 신神기氣와 피를 돌려내면서 조각의 지평을 우주 자연만큼이나 무한대로 넓혀낸 사람이다. 사물의 본 질을 원통이나 원추, 점·선·면으로 분해하고 환원시켜 낸 사람이 세잔이나 칸딘스키와 같은 작가다.
100 여 년 전 서구에서 추상미술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지만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태초로부터 점·선·면까지 갈 필요도없고‘획劃’하나로내뜻을무한대로추상해왔다.그것이바로서書다.획의곡직曲直,즉리듬의 아름다움과 구축미를 일기一氣로 관철해내는 사의寫意의 덩어리내지는 결정체, 원형질原形質이 바로 서 書다. 요컨대 서書의 삼차원적 구현이 김종영의 불각의 각刻이다.”
이동국에 의하면 선생은 「불각의 미」를 통해 ‘사의’라는 필묵언어로 서구추상조각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조 각의 지평을 우주 자연으로 넓혀나갔다. 바꿔 말하면, 선생은 서구조각언어와 동아시아 필묵언어를 혼융 하여 세계조각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이다. 주목할 점은 그가 처음으로 ‘불각을 사의라 해석한 것’이다.
이 전시와 함께 선생의 예술세계를 주제로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전 학술대회와의 차이점이라 하면 논문발표자의 전공이 서양미술사에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동일 교수, 문학평론가인 김우 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서예가 김종원, 철학자 정세근 교수, 미술사학자 홍선표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동 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와 같이 다양한 전공분야의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관점에서 선생의 예술세계를 살펴보았다.
모든 연구자들이 유의미한 논문을 발표하였지만 특히 김우창 교수의 「공간, 서사, 조각-김종영 조각의 한국적 공간」에서 선생의 1953년 작 『새』의 형태를 선생 서예작품 중 선생이 즐겨 쓴 장자莊子 외편外篇 천도天道의 내용18)과 연계하여 설명한 것이 주목을 받았다. 김우창 교수에 따르면, 브랑쿠지의 비상하는 듯한새와달리선생의새는‘중력을따라땅위에안정한모습’이다.이와같은설명이가능한것은선생의 작품의끝,즉새의머리부분을‘원형의마개형태’로마무리하였기때문이다.이런모습이선생이즐겨쓴 장자 외편 천도에서 인용한 “覆載天地복재천지‘에 내포된 우주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기존 연 구가 선생의 『새』와 브랑쿠시의 『새』의 형태가 유사함에 천착하며, 형태상의 영향관계를 살핀 비교연구였 다면,김우창교수의글을통해브랑쿠지의새를선생이어떤관점에서접근하여무엇을실험하고자한작 품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지난 세기 한국미술계의 세태를 감안할 때, 김동일 교수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불각의 의미를 살펴본 논문, 「김종영의 ‘불각’에 대한 상징투쟁론적 해석」 도 불각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어주었다. 논문 제목에 ‘상징투쟁론’이 언급된 것과 같이 불각에 대한 분석틀을 ‘장場이론’으로 예술사회학 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의 ‘상징투쟁’개념을 원용하였다. 그에 따르면 해방 후 이념과 정치적 흐름을 성찰하며 선생은 자신의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조각가로서 ‘불각’이라는 매우 역설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선생이 타계할 때까지 예술, 특히 조각 은 권력에 예속되어 예술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선생 에게 불각이란 ‘예술적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저항, 그리고 자연과 유희정신에 기반 한 조각의 재규 정이라는 이중의 실천’이라고 설명하였다.
학술대회는 위에 살펴 본 연구논문과 더불어 의외의 소득도 있었다. 학술대회를 참관했던 조각가 김용수 가 종합토의 시간에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 불각의 개념과 선생의 서예와 조각 작품의 상관성에 대해 「김종 영 예술의 성격과 재평가-학술대회 참관 소고小考」19)라는 제하의 글로 정리하여 미술관으로 보내왔다. 필 자는 이를 계기로 『김종영미술관 소식지』 제17호에 특집 「불각의 미, 어떻게 볼 것인가?」를 기획하여 김용 수의 글과 학술대회에서 논문을 발표한 서예가 김종원의 글을 게재하였다. 간략하게 김용수 글의 주요 내 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동양과 서양은 언어에 대해 인식의 차이가 확연하였다. 동양은 언어로 정의를 내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 다. 실례로 『도덕경』 첫 장에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즉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반면 서양의 언어관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과 같이 언어를 중시한다. 이러한 서구 언어 전통의 극단이 비트켄슈 타인이다. 동서의 상충되는 언어관을 전제하지 않고 선생의 불각을 살피면 본래 선생이 사용한 의미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 서양식 학문 방법에 익숙한 이 시대 연구자들은 이점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불각’의 기원은 『장자莊子』 외편外篇 「각의刻意」장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불각의 의미는 ‘당시에 핍박한 민생을 내팽긴 채 고담준론만 일삼는 지식인들에게 가한 일침이었다. 원전에 불각은 “...若夫 不刻意 而高 ... ”이라 하여 풀어쓰면 “만약 대저 (억지로)뜻을 벼리거나 곧추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경지’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각刻은 유형의 형태를 깎는 것이 아니라 무형의 의식세계를 조련한다는 뜻 이다. 선생은 이 의미를 통찰하였기에 「불각의 미」의 초점은 ‘뜻을 중히 여김’에 맞춰있다. ‘뜻’은 한자문화 권의 ‘사의寫意’를 지칭하며, ‘정신적 태도’는 서양의 ‘추상정신’을 대변한다. 서양에서 최초의 추상화를 그 린 칸딘스키가 추상 동인動因이라 한 “내적 필연성 inner necessity”은 ‘의意’와 커다란 차이가 없다. 결국 동서미술은 ‘사의’와 ‘추상’을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선생이 ‘사의’ 대신에 ‘불각’을 선택한 이유는 당신이 조각가임을 늘 의식하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찾은 불각은 무엇인가? 선생의 서예작품 중 「自然中 有成法」이 있다. ‘자연 가운데 이루 는 법이 있다’는 의미이다. 선생이 조각가로서 자연을 관찰한 남다른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인위적인 행위이기에, 자연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초월의식이 필요하다. 작가 의도는 최소화 하고 사물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각은 깍지 않는 ‘행위’가 아닌 예술 하는 ‘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서예가 김종원은 「우성 김종영의 刻과 不刻의 세계」22)라는 제하의 기고문을 통해 선생이 서예작품에 낙관한 아호를 살피면 난해한 불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선생이 초기에 낙관한 아호는 刻人, 刻道人에서 刻老道人으로 그리고 환갑 즈음에 不刻道人으로 바뀌었다. ‘각’에서 ‘불각’으로, 상반된 개념의 아호로 바뀐 것이다. 한편 人에서 道人이라 변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 人에서 수행자 道人으로 입장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선생의 예서隷書 작품 『根道核藝』가 이를 방증한다. 선생에게 학문과 예술 은 등가관계이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의 서예작품을 통해 선생의 독서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에 집중되어 있음을 감안하 면, ‘각’과 ‘불각’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입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자 외편 「刻意」장의 ‘각’과 ‘불각’도 ‘유위’와 ‘무위’, 즉 전통적인 유가와 도가의 차이로 살필 수 있다. 선생이 ‘불각도인’이라 낙관한 것은 환갑 즈음이다. 그때 선생은 비로소 자신의 아호에 불각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선생은 수행자道 人로서 본격적으로 자연스러움과 뜻을 중시하는 불각의 미를 지향한 것이다. 불각이 행위가 아니라 태도 이고, 학문과 예술은 등가이므로 불각을 지향함은 정도에서 벗어난 당시 미술계 혹은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이 선생의 유고 「불각의 미」가 세상에 공개된 이래 불각을 토대로 선생의 예술세계에 대해 논의된 내용이다.
요약해보면 초기에는 선생이 각백刻伯, 즉 ‘조각가 중에 맏이’라 불린 것과 같이 조각가에 초점을 맞춰 ‘불 각’을 ‘깎지 않는다’는 의미로 행위에 방점을 두고 살폈다. 불각을 행위의 최소화로 이해하고, 행위의 최소 화는 서구의 레디메이드와 미니멀리즘과 연관시켜 설명하였다. 이후 불각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 선생의 추상조각과 서구추상조각과의 형태적 유사성을 살피는데 집중하였다. 그 원인은 이십세기 한국미 술사에서 몇몇 평론가들이 1958년 즈음 선보이기 시작한 일군의 앵포르멜 작업을 한국현대미술의 기점 으로 설정한 것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적지 않은 미술사학자들은 당시 청년 작가들이 앵포르멜 작 업에 다다른 내적 필연성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앵포르멜은 당시 청년작가들에 게서발현된‘새것콤플렉스’의한사례라할수있다.이와같은미술사학계의분위기가선생작품연구에 도 암암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지난 세기 한국 사회 전체가 서구화에 매진하였기에 그들을 모본으로 삼아 그들을 뒤따라가는 형국이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편 2009년 서예작품 공개는 선생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인 선생이 일생을 서예에 정진하였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한 선생의 예술세 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학제간 연구가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2017년 서예 박물관 전시 『20세기 서화리 술 거장전 1-김종영 붓으로 조각하다』가 좋은 예이다. 이 전시를 통해 비로소 이십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선 생의 자리매김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첫 발을 내디뎠다. 이십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선생의 위상을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족하다.
김용수가 제기한 것과 같이 ‘불각’을 서양 학문의 관점에서만 살펴서는 불가의 진가 혹은 진의를 확인할 수 없다는 조언은 앞으로 선생을 연구하는 데 있어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선생은 전통 서화의 진수를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구결과를 토대로 불가의 미를 다시 한 번 읽어보기로 하겠다.
김종영 선생이 「불각의 미」를 쓸 때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이거나 쉰 초반이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 는 「불각의 미」를 쓴 노트 표지에 『장미일기 1964』라고 인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기장 맨 앞에 선생이 우리 나이로 쉰이 되던 정월 초하루에 의미 있는 일기를 썼다.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
지천명知天命이 되는 첫날의 다짐이다. 선생의 당면과제는 실험의 결과를 종합하는 것이다. 정월초하루 일기 뒤에 선생은 「溫故知新」을 시작으로 그동안 당신이 살핀 주요 화두를 조목조목 정리하였다. 모두 옥 고玉稿이지만 특히 이 일기장에서 주목할 글은 「순수와 종합」, 「생활과 예술」, 「예술의 질을 높이는 사람」, 「제작과 반성」, 「예술과 과학」, 「불각의 미」, 「예술, 인생, 사랑」, 그리고 「유희삼매」이다. 「순수와 종합」을 통해 선생이 육이오동란 후 십년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실험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어 떻게 ‘추상의 가능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생활과 예술」 그리고 「예술의 질을 높이는 사람」은 작가로서의 삶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성찰이다. 「제작과 반성」은 당시 미술계의 세태에 대 한 유감 표명이다. 이 글을 통해 어떤 연유에서 생전에 선생이 ‘과작寡作의 작가’, 즉 ‘작품이 적은 작가’ 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까지 전시를 극도로 자제하였는지 추론해 볼 수 있다.
「예술과 과학」에서 선생은 한국미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국미술계가 과학으로 대변되는 서구인들의 논 리적 사고를 보완해야 함을 촉구했다. 「불각의 미」, 「예술, 인생, 사랑 십장十障」, 그리고 「유희삼매」는 선생 의 예술관을 정리한 글이다. 선생은 「유희삼매」를 통해 작가는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으로, 공리 를 염두에 두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예술, 인생, 사랑 십장」은 지속적으 로 정리하여, 선생이 1980년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기념하여 심혈을 기울여 간행한 조각 작품 집에 게재한 「자서自書」에 「인생, 예술, 사랑」으로 순서를 바꿔 여섯 장으로 요약정리 하였다.
결론은 “예 술의 목표는 통찰”이다. 이를 통해 선생이 하나의 화두를 가지고 십년이상 오랜 시간을 심사숙고하였다는 점에 절로 감탄할 따름이다. 이상과 같이 「예술, 인생, 사랑」과 「유희삼매」는 광의의 예술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불각의 미」는 글 제목 으로만 봐서는 조각에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예술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꼭지 글은 씨줄과 날줄 과 같이 서로 엮여있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 정리한 글이 바로 1980년 덕수궁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기념하여 간행한 조각 작품집 말미에 게재한 「자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선생은 「불각의 미」를 통해 짧지만 매우 함축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화 두를 논하고 있다. 첫째, ‘뜻’을 중시한 동양의 미학과 서양의 ‘추상정신’은 같은 격으로 볼 수 있다. 뜻을 중 시한 동양미학의 특수성과 이십세기 서양에서 등장한 추상정신의 특수성을 비교 성찰하면 미래에 인류보 편적인 예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추정은 선생이 1958년 6월 9일자 『『대학신문』에 게재한 「이 념상으로 본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에서 “보편성에 기반을 둔 특수성만이 후일 세계문화사의 가치를 높이 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동서양미술이 이러한 세계적 자각에서 명일明日을 지향한다면, 인류는 한층 높은 단계에서 하나의 세계미술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그림은 영원함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은 죽음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한 존재의 잊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잊히지 않기 위해 그림을 도구로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동양과 서양이 공히 사용하고 있는 영정이다. 한편 오랜 시간 다양한 비평을 견 딘 작품은 시공을 초월해 고전이 된다. 고전이 되는 순간 그 작품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1955년 11월에 선생은“지구상의 어느 곳에 고 통할 수 있는 보편성과 어느 시대이고 생명을 잃지 않 는 영원성을 가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본인의 소망을 밝혔다. 또한 앞서 살펴본 「인생, 예술, 사랑」에서 도 선생은 무한성과 영원성을 언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작업의 단초는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항상 주위의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새롭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남다르게 주위를 살펴야 한다. 더불어 예술은 어떤 공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과 태도로 예 술에 임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유희삼매’의 경지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참 자유를 맛볼 수 있다. 「불각의 미」를 살피기위해서는 먼저 중국 수석의 미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수석은 계곡의 돌 이 오랜 시간 자연에 의해 형태가 만들어진 돌이다. 보통사람이 보기에는 일개 돌이지만 수집가의 심미안 에 따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이리저리 다각도로 살펴야 한다. 좌대에 어떻게 놓을지 결정하는 정도로 인위적인 행위는 최소화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일개 돌이 자신만의 자연을 품고 있는 독립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결국 수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며, 그것을 감식 하여 선택할 수 있는 수집가의 안목이다.
「순수와 종합」에서 선생 스스로 밝힌 것과 같이 선생은 지난 십년동안 형체와 사물의 순수성을 탐구하기 위 해 자연 관찰에 매진하였다. 선생의 여러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1958년 1월 8일에 그린 드로 잉작품을 살펴보자. 선생은 한겨울에 가지만 남아있는 나무를 그리고 여백에 다음과 같이 단상을 적었다. “수목은 인체혈관의 분포 상태를 연상시킨다. 인체의 입체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공간에서 자유롭 게 뻗은 수목을 세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양자는 결국 생명체로서 형태와 구성에서 많은 공통성을 갖 는다.” 한편 선생은 「예술가와 꿈」이란 제하의 글에서 “예술의 진실을 자연의 법칙에서 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고 하였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을 사색(꿈)27) 에서 얻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예술 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런 태도를 서예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7년 유하榴夏(음력 5월)에 『장자莊子』 「천하 天下」편의 글을 인용한 「判天地之美판천지지미 析萬物之理석만물지리」이다. 풀어쓰면 ‘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만물의 이치를 분석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선생은 ‘刻道人각도인’, 즉 ‘조각을 통해 삶의 도리 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낙관하였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自然中자연중 有成法유성법』, ‘자연 가운데 이 루는 법이 있다’는 말이다. 선생은 자연을 본보기 삼아 조형원리를 모색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을 통 해 삶의 도리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불각의 미」에는 두 개의 주요 핵심어가 있다. ‘자연自然’과 ‘뜻’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의 개념은 영 어 ‘nature의 번역어’ 자연이다. 한자 ‘자연’의 원래 의미는 ‘인위人爲’의 반대어 ‘무위無爲’와 함께하여 인위 적인 것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여 그 이치 를 깨달으면, 더불어 삶의 도리 또한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중국 문예론에는 ‘관물취상觀物取 象’-사물을 관찰하여 상을 취함-과 ‘이물비덕以物比德’-사물로서 덕을 비유함-이라는 독특한 미학이 발전하 였다. 무엇보다도 사물을 면밀히 관찰한 후 그 대상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목의 상징물로 적합한지 따져, 적합하다고 판단이 서면 특정 덕목의 상징물로서 조형예술의 소재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군자四君子’이다. 주지하다시피 대나무를 그릴 때 중요시 했던 것은 ‘흉중성죽胸中成竹’, 붓을 들기 전에 마음속에 먼저 대나무가 그려져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사가 아닌 ‘사의寫意’, 즉 ‘뜻을 그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에 임하는 서양과 동양의 태도의 차이가 드러난다. 선생은 그런 동 서의 미술이 이십세기 들어 뜻과 추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시공을 초월하여 소통할 수 있음을 통찰하 였다. 선생은 ‘뜻’을 ‘추상’의 번역어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격格’으로 풀어 설명하였다.
선생의 견해를 따른다면 ‘추상’은 ‘사의寫意, 즉 뜻을 그리기’에 일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각자의 뜻은 매 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만큼 광범위하다. 일생을 처사로 산 부친으로부터 선비로서 갖춰야할 소양교육을 익힌 선생에게 자연은 조형원리의 본보기 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며, 그와 같은 본보기를 세심히 관찰하여 그 원리에 따라 제작한 작품은 스스로 그러 하게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작품은 고유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내 작품은 어떠한 무엇으로나 기록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기를 바라고 싶다.
실제로 작 품 처리에 있어 터치를 깨끗이 지워 버리기도 하고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도 많은 신경을 쓴다. 이렇게 해서 「깎아 만든 조각」으로서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하나의 객관체로서 자연스럽게 또는 필연적으로 작품이 있게 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자연의 묘사가 아닌 작품으로서의 생명감을 갖 게 되기를 바란다.…”
선생의 조각 작품에 표제가 없는 이유와 함께, ‘불각의 의미’를 부언설명하고 있다. 선생은 이와 같은 관점 에서 브랑쿠시와 헨리 무어의 작품을 보고 ‘하나의 객관체로서 자연스럽게 또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작 품’으로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의 출발점은 동경미술학교 학풍에서 비롯되었다. 선생은 동경유학시 절 동경미술학교의 학풍이 사실적인 재현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수업 과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선생은 일본화 된 서양조각을 배우면서 이점이 불만이었다. 선생이 생각한 예술이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감 동을 자유롭게 표현’30)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선생은 당시 서양 조각가들의 화집을 보며 예술로서의 조 각이 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선생은 그 후로 오랜 세월의 모색과 방황 끝에 추상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 면서부터 여러 가지 숙제가 다소 풀리는 듯하였다. 실제로 선생은 1953년 제2회 국전에 『새』를 발표한 이 래 사십대를 온전히 서구추상미술을 연구하는 데 집중하였다. 지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생이 손수 『Abstract Art』라고 제목을 적은 한 권의 대학노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은 1958년 해방 후 최초 로 개최된 국제교류전인 미네소타대학과의 교류전을 보고 이십세기 한국미술이 나아갈 바가 “보편성에 기 반 한 특수성”을 모색하는 것이라 갈파했다.
수업시간에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기를 개척하고 표현하려 면 우선 남의 일을 이해해야 한다. 자기를 비옥하게, 사고를 풍부하게 하고, ‘대등한 처지에서’ 이해해야 한 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여정을 거쳐 선생이 오십 즈음에 「불각의 미」를 쓴 것이다. ‘장미노트’에 「불각의 미」를 쓸 당시 선생의 시대인식은 어떠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글이 앞서 거론한 「제작과 반성」이다. 생전의 선생을 기억하는 분들은 선생이 다른 작가들과 각별한 교류가 없었다고 회고한 다.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일상이었다고 한다. 물론 선생의 성격 탓도 있었겠으나, 아래 글을 읽어보면 또 다른 이유를 추론해볼 수 있다.
“무지와 교활이 범람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진리를 논하고 엄한 원칙을 따지는 것은 피하고 있다. 주위에 이러한 말을 주고받을 교우도 거의 없어졌거니와 때와 곳을 얻지 못한 고담준론高談峻論이 일에 방해가 되고 신변을 고독하게만 만드는 것 같다. 차라리 자성과 명상을 벗 삼아 일에 몰두하는 편이 나으리라. 대 체로 예술가를 훈련시키는 것은 제작과 반성으로 족하다. 겸양과 용기와 사랑의 미덕을 길러 주는 것은 오 직 제작의 길 뿐이다.”선생은 이 글을 「불각의 미」 바로 앞에 썼다. 글 내용으로 봐서 선생 주위에 격의 없이 인생과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상대가 없었음을 짐작케 된다.
또한 육이오 동란 이후 충혼탑과 더불어 1960년대는 동상 건립 붐 이 일어, 소수의 조각가들은 이를 통해 치부하였다. 예술의 본말이 전도된 시대였다. 선생은 예술이 권력의 간섭으로 인해 타락할 수 있기에, 작품은 철두철미하게 작가로부터의 순수한 소산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 다. 선생이 1967년부터 순차적으로 건립될 애국선열조상제작을 의뢰받았으나 거절한 것도 이런 이유 에서다. 한편 청년작가들은 당시 최신 화풍이라 할 수 있는 앵포르멜 화풍의 그림에 매진하였다. 한마디로 선생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절대고독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며 「불각의 미」의 마지막을 “인간의 절실한 요구인 행복이란 것도 백억의 재산이나 절대한 재력에 있다기보다 극히 사소한 일시의 기분이나 생리적인 어떤 조화에서 실제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자문자답으로 끝맺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내용이 「생활과 예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글 말미에 선생은 채근담 후집의 글을 적었다. 1966년에는 이 글을 서예작품으로 쓰고 ‘刻道人’이라고 낙관하였다. 그 시대를 견디는 선생의 다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여하튼 선생이 자신의 서예작품에 ‘불각도인’이라 낙관을 한 것은 1974년 환갑 즈음이다. 훗날 본인의 작 업실 당호로 마음에 둔 『불각재』를 예서로 쓴 것도 이즈음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생이 「불각의 미」를 쓰 고 ‘불각도인’이라 낙관하기까지는 약 십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지천명에 선생은 「불각의 미」를 통하여 동양의 사의寫意와 서양의 추상이 이십세기 동서미술의 교집합 임을 자각하고, 본인이 자각한 불각의 도리를 추구하는 작가, 불각도인이라고 선언하기까지 또다시 십년 이 걸렸다. 즉 환갑 즈음이다. 불각도인이라 낙관한 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하나는 한 예술가 로서 자신의 예술이 경지에 이르렀다는 확신이 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추측은 불각도인이라 낙관한 즈음부터 선생의 조각 작품과 드로잉 작품들은 선생이 그동안 관찰하며 실험한 여러 모티브-인체, 산, 나무 를 포함한 식물, 삼선교 풍경-가 혼융되어 선생만의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조각 작품은 더 욱 더 간결해졌다. 한편 1958년 이래 ‘편평한 것과 평면적인 것의 차이’에 대해 오랜 시간 성찰한 결과물로 서 1979년 이후 선생은 콜라주 작업에 전념하였다.
선생의 작품세계를 살핌에 있어 가정이란 별의미가 없겠으나, 선생이 1982년 지병으로 타계하지 않았다면, 콜라주 작업을 토대로 ‘불각의 미’가 좀 더 심화된 조각 작업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다른 하나는 앞서 살펴본 김동일 교수와 서예가 김종원의 견해와 같이 선생이 불각도인이라 낙관한 것 은 당시 세태에 대한 선생의 견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앞서 살펴본 「제 작과 반성」에 밝힌 선생의 시대인식과 더불어, 1973년 늦가을에 선생이 당대唐代 명필인 안진경顔眞卿의 『쟁좌위고爭座位稿』를 임서臨書하였기 때문이다. 휘문고보 이 학년 때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 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안진경체로 쓴 「원정비」로 전국 장원을 차지한 선생이 환갑을 바라보며 다시 그의 글을 임서를 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선생은 『쟁좌위고』에서 안진경 이 인용한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제5에 나오는 일시逸詩 “行百里者反九十”을 여러 차례 썼다. 이때 만 해도 선생은 ‘각도인’이라 낙관하였다. 行百里者反九十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진秦 무왕武王의 교만 함을 걱정한 신하가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충고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상기하면, 이 글을 반복해서 쓴 이유 가 학장임기를 마친 선생의 다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세태에 대한 성찰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1969년에 삼선개헌이 있었고, 1972년 시월유신이 단행된 이후 일련의 사태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선생은 동경유학시절부터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진선미를 논하는 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추상작업을 하는 예술가는 현실에서 눈 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우스운 편견인데, 그 이유는 추상작가 또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진정한 미술가의 사회적 사명은 시대의 미의식에 관한 근본문제를 해결하고 미의식을 높이는 데 일 조하여, 시대의 생활형식의 모든 면에 이르기까지 미를 갖게 하는 근저를 만드는데 있다고 하였다. 선생 은 추상미술에 전념하였음에도 서양의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예술의 목표는 통찰’이라는 결론과 같이 선생은 세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선생은 1953년 불혹을 바라볼 즈음부터 십년간 동시대 서구미술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체험 해보기 위해 따라 그려보고, 다양한 실험작을 제작하여 자기화하고자 하였다. 최종태 명예관장의 표현과 같이 습작기였다. 선생은 지천명에 ‘불각의 미’를 통해 구체적인 작업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실험한 것을 종 합해 나갔으며, 환갑 즈음부터 선생은 본격적으로 ‘불각의 미’를 작품으로 실현해 나갔다. 서두름이 없었 다. 그리고 그 과정은 글쓰기와 독서, 서예, 그리고 사색과 함께하였다. 이런 태도는 선생이 일생을 정진한 서예 공부법에서 비롯되었다. 한 가지 첨언한다면 이 모든 것의 사표師表는 추사秋史 선생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선생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지난 세기 한국미술계에서 선생의 위상을 재고 하는 데에 있어서 「불각의 미」는 매우 중요한 글 중 하나이다. 그러나 선생이 이 글을 쓴 것은 반세기 전이 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압축 성장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과정을 거쳐 급기야 2017년 한국의 세계수 출 순위는 육위에 올라섰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하였다. 미술생태계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국제 교류전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지금은 필자가 아는 것만 해도 다섯 개의 국제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 1980년대 해외유학을 자유화 한 이래 수많은 청년작가 지망생들이 구미 미술계를 견문하고 귀국하였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통해 해외 미술계의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 할 수 있다.
한국미술계는 더 이상 구미 미술계와 시차 없이 약동하고 있다. 한국미술계의 세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미술계가 그만큼의 담론을 생산할 수 있 는 역량이 되는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수많은 전시회와 대규모 국제비엔날레를 다섯 개씩이나 개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담론소비국에 머무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의 특수성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인류보편적 인 이론화 작업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미비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타의 상호비교분석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 나아감을 통해 자아 발전을 도모해야 함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를 토대로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의 특수성을 살리는 것이 세계 속의 한국미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궁극의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지금도 외치는 구호이다. 맞는 듯하면서도 틀린 구호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보편성을 기반으로 한국적인 특수성을 표현한 작품은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특수성이 가장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다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 결국 끊임없이 치 열하게 자타의 비교 성찰을 통해 보편성을 추출해 낼 때 그때 비로소 담론생산국의 반열에 이르게 된다. 반세기전 선생이 「불각의 미」를 쓸 당시는 한국미술계는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서구의 동시대미술에 경도되어 온통 앵포르멜이라 불리는 추상표현주의식 그림에 편승하던 때였다. 전통 서화는 고루한 것으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서예에 정진하며 필묵에서 비롯된 사의와 서구 동시대 미술의 추상 정신을 상호 비교하여 ‘뜻’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낸 선생의 혜안은 담론생산국의 반열에 오르기를 갈망하 는 지금의 한국미술계에 좋은 본보기이다. 즉, 선생의 말과 같이 ‘비판과 반성이라는 예술가의 정신적 생리 가 결여되면 모방에만 급급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과 같이 선생은 작품의 소재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주변에 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결국 작가는 일상을 시청視聽하듯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여 꼼꼼하게 견문해야 한다. 한마디로 작가는 남다르게 보는 눈을 갖춰야 한다. 선생은 이와 같이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진실한 노력과 순수한 정신에서 이루어진 예술은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전지구화 된 자본주의 시대이다. 모든 가치의 척도는 돈이다.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앞서 살핀 것과 같이 선생이 「불각의 미」를 쓰던 즈음에도 조각가들은 애국선열조상제작에 참여하면 치부를 할 수 있 었다. 당시 선생도 동상제작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당신은 ‘사실적인 것은 못한다.’는 이유를 내세 웠다. 예술가가 공리를 위해 작품을 제작하면 창작의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다.
선생은 이 지점 을 경계하였다. 선생은 「불각의 미」를 “행복이란 것도 백억의 재산이나 절대한 권력에 있다기보다 극히 사 소한 일시의 기분이나 생리적인 어떤 조화에서 실제 누리고 있지 않는가.”라고 당신의 소회로 마무리하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후학들에게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각자 이상과 처한 현실을 고려하여 처지에 맞게 살아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강조한 것은 ‘비판과 반성’이다. 전지구화 된 자본주의시대 를 살아가는 작가들에게 제도와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은 점차 희박해지는 듯하다. 선생이 정년퇴임을 하 며 『대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후학들에게 진선미와 더불어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것이 새삼스럽다.
실제로 선생은 1953년 제2회 국전에 『새』를 출품하였을 때 선생은 혹평을 들었음에도, 선생은 묵묵히 십년을 실험과 연구에 몰두하였다. 후학들은 이런 선생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46) 이런 인고의 과정을 거친 선생의 결과물이 「불각의 미」이다. 그리고 다시 십년 후에 ‘불각도인’이라 낙관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염두에 두고 선생을 살펴보면, 이십세기 한국미술사에서 선생만큼 시대와 미술을 통찰 하며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위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한 작가가 없다.
선생은 자신의 아호 又誠과 같이 성실 하고 또 성실하였다. 그 결과 추사 선생이 추사체로 동아시아 서예사에 한 페이지를 쓴 것과 같이, 선생은 조각 전통이 일천한 이 땅에서 조각의 지평을 자연으로 확장시켜, 세계 조각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지 삼십육 년이 지났지만 작가로서 선생의 성찰은 지금도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CHONGYUNG KIM
“Beauty of Non-Car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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