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을 표상하는 청년 혹은 청춘은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 민주화 운동 등 기성 체제의 부조리를 거부하고 세상을 진일보시키는 실천적 주체에서 가혹한 경쟁구도 속 생존 투쟁에 내몰려 이전 청년들이 구가했던 정치적 열정, 역동성, 저항, 대의, 무한한 가능성 대신 냉소와 우울, 무기력과 더 밀착된 사회적 타자로 전락해버린 현재의 청춘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청년의 위 상과 의미는 격차를 보여 왔다.
당대의 사회문화적 조건과의 필연적 관계성을 감안하더라도 청년들의 의 지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수렴되는 규격화된 표상들은 청년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하는 덕목처럼 신화화 되어 억압과 폭력으로 작용하거나 암울한 프레임으로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는 불편한 꼬리표가 되 기도 하였다. 안전한 보호막을 벗어 던지고 각자 제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며 새로운 삶의 단계로 접어들려 는 청년은 이상화되든 타자화되든 사회문화적 풍경을 유의미하게 점유하는 문제적 주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외부로부터 덧씌워져 남용된 규정이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청춘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 들의 실존적 정황을 포착할 수 있을까? <젊음의 심연_순응과 탈주 사이>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단서를 얻 기위해진폭이큰보편적감정의구조를탐색한다는것이파편적이해를재확인하는것밖에는될수없다 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국적과 문화권의 영상 미술이 들려주는, 청춘의 자아 내부로부터 발현된 사 적이고주관적인감정과정서에관한진솔한이야기에귀기울이려한다.이는국내에서최근몇년간이 미 광풍처럼 떠들썩하게 휩쓸고 일시적으로 소강한 듯 보이는 청년 담론을 다시 소환하여 동시대 청년들 의 현실과 실존적 현안을 기만한 위선적 낙관론을 제시하거나 어설픈 위로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렇다 고이미냉소와자조로점철되어있는이들의정서에비관론적이야기를보탤의도는더욱이없다.다만청 춘의 다층적이고 불분명한 내면적 지형을 통과하면서 그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가려는 시도이 며 말, 행위, 표정 혹은 상상의 장치로 드러나는 이들의 심리적 징후와 실존적 정황들이 공감의 인간학으로 서 어떻게 영상 미학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과도기적 경계에 서 있는 청년은 심리적 열병을 가장 지독하게 치르는 주체이다. 열정과 좌절, 두려움과 기 대, 희망과 불안, 풍요와 결핍, 욕망과 공허, 환희와 우울이 혼재하는 정신적 혼란과 방황, 감정의 소용돌 이 속에서 위태롭게 실존적 균형을 모색한다. 이들은 제도권이 성숙/정상이라고 언명한 세계로의 진입을 지향하거나 기성화된 욕망의 거부를 타진하는 노정에서 ‘내가 아닌 나’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나’의 분열 을 맞거나 동시에 추구하는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일반적인 성장의 논리로 보자면, 기성 체제로의 안착은 대타자가 주입한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성숙한 주체(어른)로 승인받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그러한 안착의 실패나 거부는 성숙의 결여 혹은 부정으로 간주되면서 미성숙과 불완전의 확증으로 귀결된다. 주목할 점 은성숙해서기성체제로진입할수있는것이아니라기성질서에부합하였기때문에성숙함을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성숙/정상과 미성숙/비정상을 구별하는 성장의 논리라는 것이 개인의 형질 변화와 의 상관성이 배제된 상징 질서의 작위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숙은 반드시 시간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도달했(다고 믿어)다가도 언제든 미끄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기 때 문에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미완의 것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한 주체 안에서 성숙과 미성숙이 완전히 분리된 채 어느 한 측면만이 특화될 수 없듯이 이 둘은 제도 편의적 구분일 뿐, 애초에 완전하게 구별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인간 본연의 한 속성이었으리라.
성숙을 요구하는 체제로부터의 인정 욕구와 지배적인 쓰임새에 기투(企投)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보전 하려는 욕망 사이에서 실존적 갈등을 겪는 청년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거나 어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장의 논리에 저항하 며 어른의 세계를 거부함으로써 온전한 자신을 지켰다는 만족감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일탈적 즐 거움을 영위하기도 하지만 자신은 어른(성숙)의 세계 바깥쪽에 있을 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 감과 박탈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순응할 때는 물론이고 저항하는 경우에도 성장의 논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젊음이 짊어진 이러한 딜레마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 존재의 불가피성일 것이다.
<젊음의 심연_순응과 탈주 사이>가 주목하는 미완의 유예된 젊음이 세상과의 타협과 길항을 횡단하는 가 운데 경험하는 이행기적 심적 반향과 변이의 내밀한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성숙의 절대 적 가치를 한번쯤 의심해 보고 ‘성숙’과 ‘미성숙’의 구분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미성숙’이 과연 ‘성숙’의 대척점에 있는지, 곰브로비치(Witold Gombrowicz)가 언급하였듯이 ‘미성숙’-열등, 불충분, 가치 미달, 철없음이인간본연의모습에더가까운건아닌지스스로에게질문해보는건어떨까?
이러한 질문들이 기성 사회에 대한 구체적 저항이나 도전을 촉발시키거나 어떤 거창한 대안적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성장이라는 것이 인생의 당연한 과정이자, 일종의 혼란과 방황의 해결 방식이라는 인식을 돌아보게 하고 성숙/정상/표준의 범주를 재점검하게 하며 나 스스로 억압을 용인했던 일상 속 지배적 언어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새로운 상상의 단초는 될 수 있지 않을까?
/ MEDIA:
The Landscape of the Heart of Youth –Between Conformity and Deviation
single channel HD video, color, silent, edition of 5 2APs, 10′ 10′′
2009
<황홀 (소리 없는 찬가)>은 ‘빅 데이 아웃(Big Day Out)’ 락 페스티벌에서 열광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고화질로 클로즈업한 슬로우 모션 영상 작업이다. 강렬하고 떠들썩한 음악과 환호성 등 모든 사운드를 차단하고 느린 화면으로 순간적인 움직임이나 표정 변화에 집중한 영상 어법은 흥분에 휩싸여 뿜어져 나오는 젊음의 활기와 역동성을 정 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으로 역전시키면서 미세한 감정의 떨림까지 포착하게 한다.
소리 없는 환호성으로 채워진 무중력 상태의 고요한 축제는 이들만의 심오한 의식이 치러지 는 장으로 숭고함과 장엄미마저 느껴진다. 마치 세속적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종교 적심취나황홀경을보는듯한이들청년의영성깃든몸짓은자신들만의진지를구축 하고 권위적이고 타산적인 주류 사회의 구속력을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무언의 매니페스토이다.
문화적 교감과 유대로 결성된 이들 공동체의 언어는 합리적 문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감정이 초과하여 들끓는 것, 자신의 존재의 함성을 외치 는 것, 자신도 모르게 어떤 희열과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생산적인 무언가로 전환될 수 도 없고 계산된 선택이나 경제적 보상을 염두에 둔 것도 아니며 도덕적 가치나 이데올 포기적 우월감을 의식한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타인의 시선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이러한 탐닉과 몰두는 시간이 중지된 공간에서 그 대상과의 순수한 만남이 목적인 진정성의 체험인 것이다.
2 channel video, color, sound
14′00′′ / 12′00′′ 2006
<아버지처럼 / 어머니처럼>은 작가 본인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특별할 것 없어 보 이는 사소한 ‘옷 입기’의 조언을 각각 구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이것저것 걸쳐 보며최선의스타일을찾아가는내용의투채널영상작업이다.
성인이되어자신의울 타리가 되어 준 부모로부터 물리적, 정신적 자립을 욕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도와 관습 혹은그들의기대와바람에서자유로울수없는묘한심리적긴장관계를엿볼수있다. 아버지가 추천하는 커리어 우먼의 복장이나 어머니가 바라는 소녀 감성의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부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신뢰와 안도감 그리고 동시에 분명 본인 스스로 원했던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그것을 능동적으로 탐색하거나 적극적으로 주 장하지 못한 미흡함과 욕구불만이 모순적으로 수렴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청년 주체의 복잡 미묘하고 불안정한 실존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청년들은 시간이 지나면 도달할 수 있는 위치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안일함의 대가로 좌절과 죄책감을 안고 있다가도 한편으로는 양육하고 보호하는 사목적(司牧的) 권력 의 케어로 존재론적 안전감을 느낀다. 낙오될 일 없는 길만을 안내하는 이 생명 권력의 규범은 이들에게 좌절과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키고 안락함을 내어준다. 자신의 삶을 빚어내는 자기결정의 결핍은‘살찐 소파’와 같은 이 비참한 낙원에서 얼마나 채워 줄 수 있을까?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17′00″,
2003
<확고한 신비로움>은 록 뮤지컬 형식을 차용하여 “신비로움”을 둘러싼 젊음의 실존의 문제를 다룬다. 중심인물인 축구 유망주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영감을 받고 예술 계로 진로를 바꾸려 하자 그의 실존적 변화를 이끈 신비로움에 대한 주변의 다양한 반 응을 경쾌하게 풀어낸다.
이 신비로움은 어른들의 감시와 처벌의 자장이 미치는 곳에 서 젊은이들의 내면에 소요와 분쟁을 일으켜 ‘신중함’과 ‘무모함’, ‘절제’와 ‘치기’ 사이에 서고 전해야 하는 투쟁의 역사를 겪게 한다. 조직 스포츠인 축구로 표상되는 기성사회는 시스템과 룰을 이해하고 잘 따르는 주체를 정식 구성원(선수)으로서 인정한다. 보편 적 공동체 질서(축구팀) 안에서 자기 몫의 역할을 다해 어엿한 사회적 구성원(선수)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자식의 아티스트로의 선회가 마뜩잖다.
청년의 내면에는 기성 사회의 범속한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한 주변의 걱정스러운 시 선, 그로 인한 자책감과 두려움의 틈을 비집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이 아닌 온전 한나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열 또한 은밀하게 자리한다. 이들에게 상실된 자아를 찾아 줄 새로운 이정표가 될지, 실체 없는 신기루가 될지 알 수 없는 이 신비로움은 획일적 성숙을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인식 불가능하고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속성에 대한 명명일 것이다.
루넬(Avital Ronell)의 ‘사유’와 ‘어리석음’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시사하듯, 이 신비로움은 기성사회가 제시하는 성숙의 모델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틈이 자, 새로운 가능성이 채워질 수 있는 어떤 여백 같은 것이지 않을까?
digital image 2018
청년예술가들은오롯이예술활동에만전념할수없는이상과괴 리되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공통된 실존적 고민을 떠안고 있다. 이정형도생계를위해작품설치및전시공간구축작업을하지 만바로그생업현장에서역설적으로본인의‘예술’작업의토대 를 마련하고 개인적 삶으로서의 주체와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정 체성-예술의 내/외부적 시선-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다양한 예술 적 층위를 탐색하며 확장 가능한 새로운 맥락들을 타진한다.
<겹 쳐지는 지점> 시리즈는 전시장이라는 노동 현장에서 전시가 성립 되기까지의 과정 중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창작 활동과는 별개의 노력과 시간을 기록한 사진작업이다. 전시가 제도로서 위력을 발 휘하기 전, 예술작품의 고고한 위상을 틀 지워주기 전의 기록들을 분류및재구성한것을무심한듯작품으로내놓은결과물은임노 동과 예술노동,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의 견고한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둘 사이의 분리와 위계화를 당연시하는 절대적 믿음을, 기성의 미술 현장을 지배하는 냉엄한 문법과 시스템의 유일성을 의심하고 재고하게 하는 질문들로 전이된다.
이번 전시의 <겹쳐지는 지점>은 기존의 시리즈에 노동 현장과는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이질적 텍스처를 이식시켜 생겨나는 충돌과 어긋남의 지점에서 또 다른 문맥을 탐구한다. 일상에서 채집한 이 미지가 노동 현장이 점유하고 있는 시공간에 접합될 때 동떨어진 맥락들이 부대끼고 연결되고 흡수되면서 새로운 시공간과 내러 티브가 무한대로 생성된다. 노동과 예술 사이의 흐릿해진 경계는 컴퓨터합성과이미지조작이라는상상적장치에의해그구분자 체가더욱무색해진다.이유희적작업주변을맴도는정체는무 엇일까? 다분히 작위적이고 잠정적인 환영에 불과한 예술이라 규 정짓는 조건과 이데올로기의 맹점 그 자체일지 모른다.
2 channel video, color, sound, 20′30′′
2017
<강>은 영상 촬영을 위해 마련된 세트장에서 젊은 남녀 주인공의 몇몇 일화들을 보여주는 연극적인 상황을 서정적인 영상으로 담 고 있다. 세트장의 배경으로 쓰인 아름답고 풍요로운 그림 풍경 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욕망이 투영된 이상적인 공간으로서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현실을 차단해 주는 장치이다.
이 비현실적인 가상공간 안에서 남녀 주인공이 연애와 결혼, 행복한 가 정을 이룬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가상과 현실이 시종일관 교차하고 그에 대한 둘 사이의 은유적 대화와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인공적 세트장이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실제인 양 행동하고 관객들은 그들의 그러한 태도가 허구이지만 실제라 고 가정하고 보는 파타 피지컬 한(pataphysical) 상황이 벌어진다. 연애-결혼-육아는 정상적인 성인이 밟아야 하는 필수적 생애 과정이라는 기성 사회가 틀 지워준 표준이다.
세트장은 청년 스스로 이 표준을 향후 실존적 토대라고 믿게 하 기 위한 장치와 같다. 자기 밖에서 타인들의 생각과 요구로 생성된 환영에서 자신의 모습,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상한다.
세상이 구축한 환상이 자기가 선택한 세상의 모습도, 존재 방식도 아님을 간파하는 것은 늘 성공적이지만은 않다. 여기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고 사회 가 요구하는 표준에 다다른다는 가정 자체가 환상임을, 계속 어디로 가 흐르지만 실제로는 아무 곳으로도 흐르지 않는 세트장의 강이 말해준다. 남자가 사다리를 타고 벽면 그림 배경 위로 올라가는 후반부 장면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이 낭만적인 드라마 가실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음을, 애초에 실패를 전제한 허구로 쌓아올린 모래성 같은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3′34′′
2013
마 퀴샤가 태어난 1980년대 초반은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이 한창 시행되던 시기였다. 마 퀴샤와 같은 ‘한자녀 정책’의 첫 세대는 부모로부터 집중된 혜택과 관심을 받아왔지만 그에 대한 대가가 너무나 혹독했다.
<무지개>는 2010년을 전후로 제작한 여 타 작품과 유사한 맥락의 영상작업으로서 부모 세대의 과도한 기 대와 관심으로 인해 상당한 심적 부담과 억압적 상황을 경험한 며 자라온 중국 청년들의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업 은 일견 아름답고 순수하며 평화로운 광경으로 보이나 영상의 흐 름을 계속 쫓다 보면 차갑고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과 무참히 으 스러지고 터지는 토마토가 주는 시청각적 긴장감으로 흰색과 불 은색의 강렬한 대비만큼이나 상충되는 감정의 역설을 자아낸다. 2007년 작 <From No.4 Pingyuanli to No.4 Tianqiaobeili> 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입안을 붉게 물들인 면도날과 유사한 맥 락에서 극적이고 파괴적이다.
이 아름다운 잔혹동화는 보기 좋은 유리잔에 선혈 같은 과즙이 담기고 남은 찌꺼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부모 세대의 왜곡된 사랑과 관심, 세속적 욕망으로 더욱 공고해진 비인간적 시스템은 이 청년들에게 더 나은 미래(성공)에 대한 희망을 볼모로 현재의 고 통을 견뎌낼 것을 강권한다. 세상이 찬양하는 ‘더 좋은 삶’, ‘성공적인 삶’은 그 잔혹한 미래에 대한 투자 때문에 이들을 텅 빈 현재 에서 심리적 출구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어른들에겐 아 무리 가혹하게 몰아세워도 거부하지 못하고 순순히 그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젊음의 소외감과 서글픔은 그저 폐기될 감정의 찌 거기에 지나지 않는다. 텅 빈 현재, 텅 빈 주체에 쏟아부은 달콤 비릿한 과즙은 누구를 위한 음료란 말인가?
single channel video, 4K HD, color, stereo, 7′25′′
2012
<나는 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다.>는 한 젊은 여자가 소 파에 앉아 관객을 향해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독백하는 장면을 시종일관 담고 있다. 영상 속 인물은 확신에 찬 어조로 설득력 있게 자신의 꿈과 이상, 생각과 신념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어느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문구를 연 상시 키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작품은 광고 캠페인, 기업의 브랜딩, 홍보 등에서 접할 수 있는 전략적이고 자극적인 언 어 혹은 과장된 설득 조의 일방적인 슬로건과 무차별적 문구 를 추출하여한 청년의 사유의 표현이자 내면의 진솔한이야 기인 양 그럴듯하게 조합한 것이다. 그러나 독백은 후반부로 접어들수록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내용 혹은 서로 상충하는 관점과 가치들의 모순된 나열, 그리고 전후 맥락을 유추할 수 없는 피상적 문구들을 마구 쏟아 내면서 그 진정성에 대 한 의구심을 남긴다. 결국 실체 없는 텅 빈 레토릭들만 독백의 무대에서 부유할 뿐이다.
성숙한 어른을 요구하는 대타자는 자본주의라는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 매스미디어와 결탁한 광고를 가담시켜 청년들 의자 의식과 정체성의 모델을 틀짓기도 한다. 이 작업은 바로 이러한 광고가 이식한 환영적 믿음-허위의식에 포섭되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언어로 제시된 비전을 욕망하는 청년의 소외된 상황을 보여준다. 하지만 후반부에 심어 놓은 복선 즉, 독백의 진정성에 의심이 생겨나고 조작된 허 구임이 서서히 드러나는 지점에서 대타자의 실패를 어렴풋 이 예고하는 듯하다. 결국이 주체는 상징 질서가 정말 무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신의 언어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15′51′′
2016
<달과 6펜스>는 서머셋 몸(William Somerset Maugham)이 고갱(Paul Gauguin) 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한 동명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 스 트릭 랜드(Charles Strickland)가 예술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떠났던 꿈의 섬, 타 이티는 우주 공간에 이식되어 원시 자연에서 SF 적 풍경으로 탈바꿈하였다.
5명의 청 년들은 동경(憧憬)의 행성인 달을 향해 가는 우주선 안에서 지구의 표준화된 언어를 버 리고 대신 춤 혹은 몸짓으로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그러나 불확실함과 모호함으로 인한 혼선은 불가피해 보인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의 표정과 몸짓 또한 기대에 차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그리 가볍지만은 않아 보인다.
같은 우주 공간 안에서 달도 지구도 모두 둥글지만 각각 끌어당기는 중력의 차이만큼 이 나 이들에게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 고착된 질서 속에 안착하여 지배적 가치를 추구하며 시스템에 순응해야 하는 지구에서 탈주하여 상상적 유토피아가 건설된 달을 향해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지구 중력이라는 보편적 힘에서 벗어나 관성적 지각을 흩트리는 무 중력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들의 선택이 공명하는 지점은 어쩌면 모두가 진리라고 믿었던 힘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지구에서나 작용할 뿐이라는 것, 다른 방식, 다른 감성으로도 행복과 하중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이다.
single channel video, color, sound, 7′42′′
2016
사사오카는 로우테크와 하이테크를 넘나드는 재기 넘치는 매체 융합으로 초현실적 시각 효과를 내며 자신만 의 독특한 작업세계를 구축해오고 있다. 인형극을 차용한 <이카루스의 신부>는 CG 작업으로 과장된 표정의 인형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여 오페레타 형식으로 서사를 이끌어 가는 영상작업이다. 그리스 신화 이카 루스와 다이달로스의 이야기를 변형, 각색하고 1920년대 코지 후키야(Koji Fukiya)의 서정시, “신부 인형 (花嫁人形)"이라는 이질적인 서사를 조합하여 익숙하면서도 낯선 상황극을 주조한다.
아버지 다이달로스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 가까이 너무 높이 날다가 추락한 이카루스는 젊음의 분방한 열 정과 자유에의 갈망에 따른 패기 있는 도전과 환희, 자기통제의 실패에 따른 무모함과 두려움이 중첩된 상징 적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 다이달로스에 의해 환생한 이카루스는 대타자 아버지의 삶의 방식에 순응하여 신부 인형, 유리코(Yoriko)와 혼인을 하게 되지만 결국 신부 일행과 함께 다이달로스를 절대자(신 또는 괴물)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살해에 가담한다.
작가 본인이 직접 연기한 신부 인형은 냉철한 판단력과 절 제, 완벽한 균형감과 서늘한 숙련으로 무장한 다이달로스를 부정하고 설사 치기 어리고 무모해 보일지라도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을 모색하는 이카루스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는 듯 보인다. 신부가 부르는 노래 가사 "call my name"이 암시하듯, 그의 호명으로 성사되는 결혼은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존재론 적 여정을 떠나기 위해 그와 맺은 새로운 계약이 아닐까? 신부 인형은 주체의 새로운 좌표를 향해, 자기 한계를 넘어설지 자기 파괴적이 될지 모르는 호기로운 비행을 주문한다. Fly!
animated film, color, sound, 4′23′′
2015
자기만의 공간인 방을 둘러싼 유폐와 소통의 위상학을 잘 드러내는 <감성적인 코>는 가까스로 유지했던 모든 사회적 관계의 무용함을 깨닫고 자발적 소외의 공간 안으로 스스로를 가둔 채 자신의 일부(코)와의 소통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몰두하며 지내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코가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 정에 반응하여 자꾸 자라남으로써 대면하게 될 본인의 비정상 성과 그로 인해 겪게 될 난처함과 불편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가피하게 남이 아닌 본인 스스로를 감정적으로 기만하는 블랙코미디를 보여준다. 그러나 가식과 허구의 삶은 이내 고독한 본연의 정체성 에 자리를 내주게 되고 남자의 코는 공간 밖으로 떠나 면서 바깥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홍콩 특유의 좁디좁은 방은 출구 없 는 청춘의 삶의 민낯을 보여주거나 그들의 심리를 대 변하는 주요 무대가 된다. 소통의 욕망만큼 강렬한 고 독의 아늑함은 관계적 삶의 지향을 권하는 상징질서의 도덕률을 유보시킨다. 자기 존재감을 보존하는 공 간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고독과 체념이 때로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소통의 욕망을 절제하는 대신, 자아를 둘러싼 상상적 지리학을 통해 자기에 대한 존재 미학을 재발견하고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는 자율적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ixed media dimension variable
2017
장애란 작가의 ‘대한 제국의 빛나는 날들 Luminous Days of Korean Empire’은 조선 왕조의 태조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왕들에 대한 사료집과 조선왕조실록, 고종이 즐겨 읽 던 서적 및 외교문서와 대한 제국 시대의 황실 문화, 예술, 건축, 음악 등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료들을 빛을 발산해내는 라이팅 북과 영상 책으로 재현하였으며, 1904년 고 조이 황제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세운 덕흥전 내 서재를 미디어 설치작업으로 재탄 생시 켜 역사의 시간 속에 영원히 빛날 서고를 구현하였다.
또한, 국립고궁 박물관에 보관돼 더 있는 고종이 당시 사용했던 가구 및 집기 등 을 재배치하고 바닥의 카펫 위에 영상작품을 쏘아 고위 관료와 사신들이 고종을 알현하던 시절의 기억을 환기시키고자 하며, 이것은 덕 홍전에 설치된 빛나는 책들과 함께 어우러져 동서양의 문물이 공존했던 대한 제국의 빛나 는 마지막 순간을 구현하고 시간과 공간의 변 화와 흐름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당시 조선과 대한 제 국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그들이 꿈꾸었던 이 상향을 재해석하여 덕흥전의 역사적, 문화적 산물을 현대적 발상으로 구현함으로써, 그 장소와 시대를 다시 되짚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로 세 우는 데 있어서 그 이해를 예술을 통해 돕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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