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 Biscuit2
브론즈, 나무 / 600 x 110 x 170cm
2006
1990년대 한국 구상조각의 전성기에 떠오 르는 별로 불리던 구본주 작가에게 ‘리얼리티 (Reality), 즉 현실’은 그의 작업의 유일한 에너 지 원천이 되었다. 또한 ‘조각(彫刻)’은 그에게 있 어 부조리한 현실을 사실적이고도 해학적인 방 법으로 사회에 고발하는 그만의 생존방식이었 다. 작가는 철저한 현실주의를 기반으로 그 시대 의 애환과 고충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 표현하 였다. 창원의 용지문화공원에 설치되는 구본주 작가의 ‘비스킷 나눠먹기 2’ 청동 주물작품은 고 용인과 피고용인이라는 다소 불편한 관계의 두 남자가 서로 마주보고 입을 크게 벌려 비스킷을 나눠먹는 긴장된 장면의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 다. 그러나 2018창원조각비엔날레의 유어예마 당에 설치되는 이 작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을 마련해주는 스트리트 퍼니처로서 사랑을 받는 작품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Patinated Bronze
2018
어느 날 감은 나의 눈 속에 알 수 없는 형상이 만들어진다. 그 형상은 사각의 공간속에 수직과 수평을 연결하는 여러 개의 사선들이 때로는 덩어리로 때로는 투명한 면이되어 알 수 없는 형상이 만들어져 움직인다. 그것은 직선이다. 현대 조각은 언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변화되고 있을까? “인간형상의 핵심은 뼈대에 있다”라고 말한 두 명의 큰 조각 가는 언제나 나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다. 눈으로만 보여지 는형상이아닌느낄수있는형상그것은언제나나의도달 점이다. 직선은 강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김청윤
Stainless Steel, Glass Casting, Stainless Mesh, X-TEND X-LED Lighting 1200 x 1200 x 1000cm
2018
아마란스(Amaranth)는 그리스어 ‘amarantos(영원히 시들지 않는)’에서 유래되었으며 과거 유럽의 수많은 시와 소설 속에서 영원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안종연의 ‘아마란스’작품은 관람객이 함께 조각 위에서 놀 수 있는 2018 창원 조각 비엔날레 유어예 마당의 대표적인 영구 설치작품으로 첨단소재 클 라스트 방식의 LED Lighting이 미디어 캔버스가 되어 다채롭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영상 등을 연출할 수 있는 융복 합영 작품으로 먼 거리에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아마란스의 아름다운 영상작업 안에는 안종연 작가의 만화경 작 업이 포함되어있다. 다양한 문양의 집적, 그 화려하면서도 중첩된 무늬의 세계는 경이로움, 바로 그 자체이다. 만화경은 또 다른 만 다라의 세계, 빛으로 만든 색의 퍼레이드이다. 이 같은 빛의 작업 을 통해 작가는 존재와 비존재 그러니까 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환 기시 키고자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하나(生死一如)라는 담론을 조형적으로 풀어낸 것인지 모른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 시간이 있다. 시간의 축적, 그것이 우리네의 일생이다. 그 시간이 자아내 는 소리와 빛, 안종연의 세계이다.
원과 수평선, 수직선이 정수이며 그녀가 회상하는 이미지라면, 물 (바다, 강, 또는 폭포)을 모티브로 하는 주기가 있다. 우리는 이미 그녀의 정원 돌조각의 물을 언급했다. 그녀의 많은 작품은 어떤 의식을 제안하고 요구하는 것 같다. 쉬면서 하는 작은 일상의 의 식–물이 담긴 대야를 청소하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멈출 고 보고, 비워내는 의식–. 그녀의 예술은 많은 부분이 철학의 일 부이다. 아마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물과 시간과 함께 흐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새벽이나 황혼의 빛이 알아차릴 수 없게 빛났다가 희미해져 가는 그 느린 변화를 볼 수 있다. 이것 은모래, 유리, 강철, 빛과 물에 술이다. 그것은 호흡과 빛이 함께 흐르는 곳이다. 물속에 있는 원은 멈추지 않는다.
붉은 화강석 185 x 80 x 120cm
2018
계곡과 산에서 오랜 시간을 그렇게 뒹굴어 생긴 형태 와 피부, 색감과 질감을 존중하면서 그 돌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형태를 파내는 것, 물질 속에서 감춰진 생명의 형상을 밖으로 가시화시키는 것, 그것이 그에 게 조각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 놓은 돌에서 어떤 형상을 추출하기 위해 재료를 학대하거나 과도하게 다루지 않고 재료와의 부단한 동화를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자연 만물과 자아가 다투 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경지를 조각으로 구현해내는 일 일 것이다. –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조각가 보채 현의 호랑이는 우리 조상들의 넉넉한 인정과 지혜, 그리고 그것을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주시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이 호랑이에게서 우러나는 수더분한 인정은 재료인 화 강암과 그것을 다룬 손맛 덕에 더더욱 잘 드러나고 있 다. 조각가는 그 돌에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인 형태를 가해 돌이 원래 지니고 있던 특질이 더욱 생생히 부각 되도록 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돌 호랑이는 우리 할아 버지의 너털웃음이 되고 우리 할머니의 함박웃음이 돼 어 우리로 하여금 푸근한 삶의 온기에 젖게 한다. –이 주헌 미술평론가
전통 민화의 까치호랑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작품은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 호랑이의 형상을 통해서 가족 간의 따뜻한 사랑과, 한국인의 여유롭고 해학적인 감 성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작가노트
Mixed Media
650 x 1000 x 200cm 2018
새로운 작업에 대한 하나의 구상을 하고 그 내용과 형상이 현현되는 일은 여전히 긴장되고 가슴 뛰는 일이다.
작품 ‘심장 유희’는 스승 김종영 선생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되었다. 생전에 나는 그를 두세 번 정도 가까이 접했던 기억 이 있다.
서울 삼선교 언덕 위, 그의 집. 작은 마당이 내다보이는 그 집 마루에 학생들과 함께 앉아서 자신의 작품이 놓여있던 마당을 응시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낡은 거실 마루 위로 떨 이어지던 햇살이 그가 뿜어내던 담배연기와 섞여 페이드인 아웃되던 삼도 흑백사진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풍경, 옅은 검버섯이 돋아난 마른 얼굴에 깊이 있게 자리하여 물리적 인 거리보다 더 멀리 응시하던 그 눈길, 시선, 그 속에 자리 한 회 갈색빛의 동공을 나는 기억한다. 당시 그의 언어는 거 의 예술 일반, 또는 조각가의 삶과 자세에 관한 것이었는데 예술에 관한 내용보다도 이러한 감성적인 분위기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그 무렵 고 답스러운 실기수업의 반복과 서투른 아방가르드에의 갈망, 전공에 대한 방황으로 헤매고 다니면서도 학과사무실 안쪽에 놓여있던 한점의 조각에 눈길이 가곤 했는데, 이 작은 천 조각은 은밀하지만 강렬하게 나의 시선을 붙잡았고 말을 걸어오곤 했다.
‘전설’이 크지 않은 조각, 녹슨 철판 쪼가리 콜라주는 매우 격정적인 감정의 상태를 마치 기와집 대문이나 홍살문처럼 보이는 추상적 형상으로 응집해 놓은 것이었는데, 별생각 없이 툭툭 잡히는 대로 거칠게 아크용접을 한 듯 보였고, 상당히 빠르게, 혹은 순식간에 완성한듯한 느낌이지만 누 구도 더 이상 가감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상태에 멈추어져 있었다. 확장하고 연결해서 말하자면 로댕의 지옥문을 매우 추상적인 자신의 언어로 번역해 놓은 것 같은 착각도 들 게 하는데 지옥 문의 인상주의적 사실성보다 매우 간결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응축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고 생 각한다.
학창시절 회화, 서양화라는 친숙했던 전공을 뒤로 하고조각이라는낯설은전공을선택하게된후,그것과갈 등하고, 방황하고, 휘청거리며 연극, 영화의 세상을 기웃거 리던 시간에도 자신의 시선보다 더 먼 곳을 응시하던 선생의 눈빛과그‘전설’은나를조각의영역에남아있게한어떤 것이 되었다.
작가의 작품들 중에는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이‘전설’을 김종영조각 의 심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교 2학년 조 국장 선생의 수업에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지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흉상 조각과 토르소로 점철되던 시절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하던 내게 브랑쿠지의 조각 ‘침묵의 탁자’는 너무나 흥미로웠고 새로운 조각에의 기대를 갖게 했다. 브랑코 지는 조각적 심장을 몇 개 더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 만 나는 ‘침묵의 탁자’를 브랑쿠시 조각의 심장이라고 생각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보이스의 코요테처럼, 백남 준의 TV 붓다처럼.
출품작 ‘심장 유희’는 스승 김종영 선생에 대한 나의 오마주이다. 창원이 낳은 한국 最古의, 最高 彫刻家에 대한 기억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창원이 우리나라 조각예술의 심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잔디 위에 낮게 깔린 형상으로 펼쳐진 심장의 형상, 그 속의 로 미끄러지고, 함께 놀고, 작품 위를 거닐면서 작금의 조각 이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조각이 놀이터가 될 필요는 없지만, 조각 위에서 놀면서 조각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가 살던 고향, 나의 살던 고향, 꽃 피는 언덕, 그 속에서 놀던 때. ‘전설’, 그 심장을 기억하며. 이천십팔 년 칠월 여름에
Painted Bronze 400 x 100 x 180cm
2018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은 목적지 없는 긴 여행을 하고 있다.‘피노키오의 거 짓말’ 작품은 무의식 속 욕망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는 우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는 지표이며, 하트 모양의 코는 현실에 대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심장과 양심을 의미한다. 다양한 이미지의 허상 속에서 살 아가는 현대인에게 '피노키오의 거짓말'은 현상을 투 영하는 매개체로써 역할을 하며 시대상을 풍자, 상징하고 있다.
Aluminum 23.5 x 32.2 x 1200cm
2018
실제보다 길게 늘여지거나 납작하게 짓 눌려진 신체. 이 한 권의 신체 조각은 할리우드 키드로 대변되는 영상세대의 추억과 기억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작가의 작업은 와이드스크린 전용으로 제작된 영화필름을 그 비례가 다른 신종 미디어로 재생할 때 생기는 이미지 왜곡 현상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렇 게 왜곡된 이미지와 함께 이따금씩 비마저 내리는 그 비현실 적 비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혔던 그 꿈이 마침내 그의 조각 속에서 실현된다. 그의 왜곡된 신체는 미디어가 재생해낸 이미지를 상기시키며, 일상을 참조한 것이지만 정작 일상보다 더 흥미진진한 시뮬라크르(실제론 없는 것인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받아들여지는 가상현실)를 암시한다. 그 조각을 지지하는 일상과 이상, 현실과 가상현실 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일찍이 작가가 꿈꿔온 영화 속의 세계로부터 건네져 온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눈엔 현실과 일상이 영화 속 세 계처럼 비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프랑스의 상황 주의 자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 소사이어티>(구경거리의 사회)라 는 저서에서 이런 현상을 예감한 바 있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한편 의 영화와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현한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가 달라진다고 했다. 작가가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신체 조각은 그 공력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미디어적이다. 그러나 첨단을 구가하는 현대판 미디어와는 그 거리가 멀다. 구닥다리 미디어, 따뜻 한 미디어, 향수를 자아내는 미디어에 가깝다. 이렇게 작가 의 조각 속엔 아날로그 미디어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시스템 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사회학적 인식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미디어가 폐기되고 신종 미디어로 대체되는 것은(왜곡된 신체에 대한 작가의 경험은 바로 그 과정에서 유래한 것) 경제적인 효용성의 법칙 즉 자본주의 시대의 실 질적인 권력구조와 관련이 깊다. 하루가 다르게 폐기처분 되는 미디어들의 대열 속에서 가장 전통적 미디어인 영화(물론 영화 자체도 진화하지만) 에로 끊임없이 자기를 되돌려 놓는 작가의 기획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정겹고 공감을 준다. –고 충환 미술평론, ‘외환권의 조각–왜곡, 현실의 균열과 그 틈새’
Incomplete Pieces
Aluminum, Sound System
300 x 300 x 220cm 2018
인류의 문명사를 통해서 가장 훌륭한 발견 중 하나는 뉴턴의 만유인력 이론이고 더 나아가 빛의 굴절의 발 견은 미술의 회화사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 가 되었다. 물리학을 통한 여러 과학적 성과들도 인류 의 문명사에 큰 업적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는데 단 마크 출신의 노벨 물리학자인 닐 보어(1885-1962) 의 광자 이론을 통한 원자모형의 발견은 그중 혁명적 성과이기도 하다. 1927년 벨기에에서 아인슈타인과의 논쟁은 유명한데 아인슈타인은 보어의 양자이론을 철저하게 부정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둘의 담론을 통해서 아인슈타인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4개로 나누어진 두상은 이런 불완전한 과학적 담론의 과정들과 유사하다. 본인은 불완전, 불안을 주제로 작 업을 진행해왔는데 불안의 요소는 현대인의 삶의 모 든 과정에서 작은 차이로 드러나며 삶의 과정에서 거 듭된 실패와 몰락의 담론을 유도해나간다. 마찬가지 로 인류 역사도 지금도 어쩌면 이런 실패의 과정 내에 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4개의 조각으로 해체된 두상은 결국 삶의 과정과 유사하다. 이 구조체는 끊임없이 완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완전한 상태인 것이다. 음이 곧 양이 고양이 곧 음인 샘이다. 또한 4개의 조각은 봄, 여름, 가을, 겨 울을 상징한다. 첫 번째 두상에서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로 시작한다. 이어서 심장박동소리, 웃음소리, 울 엄소리, 바람소리, 신음 소리, 여러 노래들, 결국은 임 조이 직전의 거친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인생의 희, 노, 애, 락의 삶의 탄생과 죽음의 여러 과정들을 소리로 대신하여 표현된다.
70 used barrels, steel tube, eco-friendly paint, mixed media / Engineer: Chang Minwoo Structural Consultants
540 x 325 x 195cm 2018
“삶의 색채”는 사색과 놀이의 인터랙티브 공간 및 퍼포먼스 공간으로, 삶을 탐색하는 개인과 공동체적 협력을 대비시킨다. 이 작품은 원래 1999년 뉴욕시의 <소크라테스 조각공 원>에 세워졌으며 작가가 꾼 꿈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자신 의 꿈속에서, 전쟁 같고 세기의 종말 같은 상황 속에서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는 우리가 그런 순간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그들 각자만의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만, 죽음의 순간은 모두가 긍정적으로 경험하길 희망하는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신의 꿈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이 스스 로 변화하는 자신을 명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창조했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동시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도 만들어졌다. 관객들은 빈 공간을 경험하지만, 여전히 작품의 안과 주변에서의 활동과 움직임을 느끼고 경험한다. 이 작품에는 수많은 “삶의 색채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화강석 120 x 60 x 320cm
2018
재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자유로우신 것 같습니다. 초기 작 품부터 지금까지 재료가 다양하게 바뀌었어요. 재료를 바꿀 때, 어떤 구체적인 이유가 있으신가요?
재료에 자유로운 편입니다. 제가 용접도 좋아하고. 철, 돌. 화강암으로 작업도 했었고, 최근 작업실 주변 바닷가에서 주운 편마석으 로 조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과 맞는 최상의 재료를 선택하니까 재질에 자유롭습니다. 특별한 이유로 재질을 바 꾼다기보다는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 ‘이주’와 관련한 시리즈 작품들이 많이 있어요. 선생님에게 ‘이주’란 어떤 의미이기에 이렇게 지속해서 표 현 하시는 걸까요? 작품들에서 ‘외로움’, ‘고독’처럼 어디론가 향해서 손을 흔드는듯한 그런 감성이 드는 이유도‘이주’와 연결이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은 초반에 생성이 있고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 좀 분명해지고 죽음으로 마무리되죠. 인간의 삶은 현재에서 만족을 찾기보다는 무언가를 찾아서 늘 이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공 간 안에서도 늘 이주하고 새로운 이주지를 찾으며 방황하죠. ‘이주의 역사’는 인류의 연대기적 기술입니다. 최초의 인류도 어떻습니까? 떠나고 계속 어딘가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끝 없는꿈과희망,자신의영혼을 찾아가는 길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늘 그렇게 ‘찾아가는 과정’이제 삶이고요. 아마도 그런 영혼의 찾아감이 외로움으로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예술 가에게는 정착하지 않는 심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5년간 방황이 있으셨다면 가족들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을 텐데 요. 전업 작가로서 가족들은 어떠세요?
전업 작가들은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 그럴 거예요. 가족들에게 미 안 합니다. 다른 예술가들은 사립학원 일도 하는데 저는 그것마저 도안했어요. 대학에서 강의 조금하고 조각 작업 관련으로 불구 찍한 일을 하고. 아내에게 많이 미안하죠. 아이도 이제 대학생인 데 멀티미디어 쪽 학과를 갔어요. 예술인들에게 ‘가족부양’이라는 말은 여전히 힘듭니다. 끝없는 꿈과 희망, 자신의 영혼을 찾아가는 길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늘 그렇게 ‘찾아가는 과정’이제 삶이고요. –삶은 끝없는 이주, 문화누리 2018년 7월 호
Granite 320x240x60cm 2018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생각 즉 상념의 바닷속을 걷고 있다. 과학의 발전으로 복잡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데서 오 는 불안과 미래에 대한 걱정, 행복한 삶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좋 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고민 등 여러 가지가 상념에 해 당한다. 이 작품은 상념을 잊고 하늘을 보며 편안해하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념의 흐름을 흐르는 물 에 비유하여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생각도 자신이 바라는 방 향으로 흘러감을 표현하였다. 또한 여러 갈래의 물줄기는 여인의 머릿결과 오버랩 되어 보이며 이 물줄기 들은 상념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많은 상념들과 살아가지만 때론 그 상념들을 상념의 바닷속에 던져 넣으며 잠시 상념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잊고 편안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본 작품은 창원 비엔날레 ‘불가의 균형’이라는 주제에 부합하는 작 품을 위해 여인의 얼굴은 최대한 단순하게 묘사하고 조각을 최소 화하여 편안함을 표현하였고, 물줄기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나타 내기 위해 흘러내리는 듯 웨이브만 표현하였다. 또한 작품의 측면 은 좌우 대칭되어 균형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Corten Steel
86 x 167 x 167cm 2010
고딕은 그로테스크의 전형, 숭고함의 정수, 전례(典禮)의 구현, 고 전의 폐기, 구조적 문자의 명료화, 12-13세기에 일어난 로마네스크 양식을 잇는 프랑스 양식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2001 년부터 고딕을 자신의 것으로 품은 벨기에의 아티스트 빔 델 보여는 고딕 양식에 새롭고 현대적인 자극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것을 유 럽의 봄날의 본보기라고 부르고 있다.
데보 예의 고딕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레이저 커팅 철판으로 만 든 고딕 장식을 수놓은 실물 크기의 건설기계들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그는 크고 작은 조각을 결합해 트럭, 불도저, 시멘트 믹서 등 의 일상적인 사물의 기념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딕은 이러한 조 각이 만들어지는 원재료, 물질로 사용되었다.
빔 엘보 예가 창원 조각 비엔날레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수학적 대 칭과 골격의 트레이 서리를 보여주는 콘크리트 믹서(Concrete Mixer)로, 건축과 기계, 신성과 세속, 여성성과 남성성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기계이다. 고딕 양식의 북유럽 성당에서 조립 부품을 가져온 이 작품은 고딕 건축의 성스러운 조화와 우주의 질서를 연 상시 키며 가벼움과 밀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콘크리트 믹서는 천상에 닿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허용하는 지상의 일시적 구조의 창 조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한다(이와 관련해서는 데보 예의 고딕 타 워를 참고하라).
Bronze
20 x 20 x 240cm (2 Pieces)
20 x 20 x 225cm (1 Piece)
2018
“삶의 색채”는 사색과 놀이의 인터랙티브 공간 및 퍼포먼스 공간으로, 삶을 탐색하는 개인과 공동체적 협력을 대비시킨다. 이 작품은 원래 1999년 뉴욕시의 <소크라테스 조각공 원>에 세워졌으며 작가가 꾼 꿈을 근거로 제작되었다. 자신 의 꿈속에서, 전쟁 같고 세기의 종말 같은 상황 속에서 절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가는 우리가 그런 순간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그들 각자만의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우리에게 언제 다가올지 모르지만, 죽음의 순간은 모두가 긍정적으로 경험하길 희망하는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신의 꿈에 대한 깊은 사색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이 스스 로 변화하는 자신을 명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창조했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동시에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도 만들어졌다. 관객들은 빈 공간을 경험하지만, 여전히 작품의 안과 주변에서의 활동과 움직임을 느끼고 경험한다. 이 작품에는 수많은 “삶의 색채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살아있다. 누군가 시험관에 서 만들어 내려 하지 않는 한.
개체의 발생에는 반드시 계통이 있어야 한다. 태아기에서 온전히 발달하는 대신 우리가 양수에서 헤엄치고 있을 때 원치 않게 반 복했던 물고기, 파충류, 오래된 포유류의 얼굴을 하고 나온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태아 발 달중에 개의 단계에서 머무른 인간은 괴물이다. 예술작품 아니겠는가?
우리가 “우월한 포유류”의 단계를 택한다면, 전부 아메바로 돌 아가는 건 어떠한가? 아니면 종벌레는 어떤가?
전통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측면에서 대중과 창작자를 교육하는 일은 지대하게 필요하고 유용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정확한 철학 적 의미, 집합적인 문화적 주체로서 우리의 존재를 통해 전달되는 영적 “종(種)”의 시작부터 어떠한 이유로든 중히 여길 이유가 없는 창조의 우연을 통한 것이 아닌 문화의 구성요소로서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한 모든 변증법적 필수 단계를 통해 이어지는 오늘날에 이르는 유기적 진화의 과정으로서 전통을 이해해야 한다. 양식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의 중시는 현재에 대하여 특징적이다. 우리가 과거로부터 기리는 것들이 오늘날의 우리가 누구인 지 설명해준다. 과거는 여럿인 동시에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것, 우리가 아는 정도, 다른 이들이 그것을 알도록 하는 방법에 달려있다. 루마니아 조각에서 과거에 존재했 고 지금도 번성하고 있는 발부에 아 – 파치 우레아 – 메드 레아 – 포포비치 트렌드, 또는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조르제 스쿠, 잘레 아, 앙헬 등의 트렌드 외에도 오늘날 미어 치아 두미트레스쿠, 네 쿨라에 파두 라우와 연결되고 있는 가네 스쿠와 그의 표현주의적 그로테스크 양식이 있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그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브랑쿠시가 있다. 우리가 오로지 이러한 계 통 중 하나에 따라 만들어진 예술만을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사실주의와 혁신 사이의 관계 또한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한 묵상을 낳는다. –사실주의와 전통, 이온 프룬제 티, 1977년 10월 “Contemporanul” 매거진에서 발췌
Clay, Galze, Epoxy 188 x 240 x 220cm
2018
안 텐션(INTENTION)은 모든 기본적인 관계에 내재된 섬세한 균형에 대해 고찰한다. 인텐션은 두 형태가 서로 다른 필요의 균형을 맞추고 각자, 또 한양대 모두에 대하여 효과가 있는 균형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춤 또는 씨름을 상징한다.
Iron, F.R.P.
150 x 45 x 80 cm 2018
현대의 작가들은 점차 개성적이고 차별화된 작품 새 계를 나타내고자 다양한 재료들을 혼합하여 사용한 고 있다. 또한,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여전히 더 많은 재료를 사용하여 상상을 초원한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시각 예술 분야에서 혼합매체의 나갈 방향을 모색하고 불가의 미를 근원 적의식을 되새긴 작가 내면의 세계를 조형적 언어로 표현해 보고자 하였다.
모든 작업에서 다양한 장르와 인접 분야의 경계를 자 이롭게 넘나들면서 실제적인 시간과 감각적 공간을 작품의 조형요소로 삼음으로써 예술을 삶과 만나게 하고, 또 다른 새로운 공간으로 구조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는 동안 신체적, 정신적인 세계의 종합적인 감각 체험으로 정립되어 공간의 예술적 감성이 체험적 공간으로 확산되고 있다.
작가 본인은 미술에서 매체로 표현되는 공간 표현의 경향과 그 공간에서 나타나는 체험적 공간 연출의 방 향성을 제시해 보고 현대 미술에서 나타나는 체험적 공간화 표현 특성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로 연구를 거 듭하고 있다. 여러 작품 속의 공간을 경험하고 다양 한 오브제와 혼합 매체를 요소로 공간으로 확장하여 사건적으로 발생하는 상황과 인간의 참여로 구성한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감각 적 공간을 창조하고 예술 자체를 일상적 환경의 공간 속으로 접근시켜 그 본질과 영역을 확장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다채로운 체험 공간으로 연출되면서 사유적인 공간으로 재해석되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작가 노트
벚나무, 대나무, 스테인리스 스틸
350 x 200 x 70cm 2018
우리나라 민주화를 닾당긴 마산 3.15의 거와 마산 항쟁 등 불의를 보 면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던 그 시민정신을 ‘창원의 힘’이란 주 제로 설정하고 시민들이 죽창을 쳐든 형상으로 상징화하였다.
Variable installation Plastic and wood
2018
나무가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이미지와 페트병의 지 처분한 이미지의 변형을 통한 공간은 한국화의 입 체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뜻하면서도 차 값 고, 아름다우면서도 지저분하며, 포근하면서도 날 키로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이미지들의 변형을 통하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과 모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산업화 이후 심각할 만큼 무분별한 쓰레기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편리함과 환경 사이에 더 갈등을 하게 된다. 점점 나빠지는 환경에 대해 인식은 하지만 모른 척 살아가고 있다. 지금 현재의 안락함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나무와 페트병의 변형을 통해 만들어낸 휴식의 공 간은 따뜻한 이미지의 나무를 차갑게 표현하고, 차가운 이미지의 페트병을 따뜻한 꽃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일상적인 관점의 전통적 조형 영역을 넘어서보다 진 보되고 과학적이며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하는 것이 주 방향입니다.
대중들에게 미래지향적이면서도 동시대를 반영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작품에 담아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주고자 합니다.
형상은 최소한에 핵심만을 보여주는 미니멀 한 접근입니다. 앞뒤가 열린 파이프를 수평적으로 정면에서 보면 건너편 물체가 투영되어 보입니다.
파이프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입니다. 수평에서 보았을 때 투명함이 더욱 극대화되는 작품, 파이프를 수직적으로 상승감을 주어 작품을 공중에 띄우는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 주제는 다양합니다. 웃는 얼굴, 신체의 일부, 동물, 캐릭터 등등의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창조 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벽에 설치되는 평면작품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배 열과 색상의 나열합니다. 회화의 영역을 파이프작업으로 표현해보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과 영역의 확장을 생각하며 그것을 파이프로 표현해 냅니다. 파이프 작품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 운 조형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조형적 가능성을 찾는 파이프 작품은 계속될 것입니다.
Pvc 비닐 가변설치
2018
‘라라랜드 프로젝트’는 현실 공간과 ‘상상’ 혹은 ‘기억’ 속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작업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공 통적으로 경험했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건 혹은 풍경 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집어내어, ‘현재’라는 시공간에 관람객과 조우할 수 있도록 기획한 프로젝트성 설치 물이다.
‘라라랜드 프로젝트’가 비단 다른 예술작품들의 방향과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일 수 있겠으나, 작품의 주제나 소재를 작가가 재해석하거나 편집하는 행위를 통해 작품의 형식이 드러나는 기존의 예술작품과는 다르 게, 작가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과거의 풍경을 그저 ‘현재’라는 시공간 안에 옮겨놓았을 뿐이라는 점 이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작품과 마주한 관람객은 즉 각적으로 작품에 개입되며, 보다 쉽게 작품과 연결돼 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과거 기억 속의 이미지와 현실 공간의 연결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 너라, 지속적으로 관계하고 부딪히면서, 이어져 나간 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더불어 그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와 현 재 속의 ‘나(개인으로써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써 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작가의 개인적 바람이 자 작품의 목적인 셈이다.
결국 모든 예술은 삶과 연결되어 있고, 삶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대지와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그것이 불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끔 예술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세계 속의 '나'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한다.
/ OUTDOOR: YUEOYE YARD